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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조각의 향방

 

미술사에서 부드러운 재료로 형태를 표현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내포한다. 전통적으로 조각은 매우 딱딱한 돌을 깎거나 금속의 표면을 광채가 나도록 하는 것처럼 오랜 기간 공을 들이는 것을 뜻한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술의 영역은 확장되었고, 그 중에서도 확장의 폭이 큰 것은 조각이다. 무엇보다도 부드러운 재질은 깃털, 잎사귀, 머리카락, 종이, 나무 등 섬유적인 특성을 기반으로 외적 형태의 유연함을 보여주고, 우리에게 친숙한 천 같은 재질이 조각의 영역에 들어옴으로 인하여 예술 작품으로의 관람객의 거리감을 가깝게 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물성에 대한 탐구가 딱딱함에서 부드러움으로 이어질수록 표현 방법적인 측면에서 지속적인 경계 허물기에 대한 재료적인 작가의 연구로 연결된다. 

강건의 작업은 부드러운 조각의 연장선상에서 실, 레진, 천, 양모 등 다양한 섬유 형태의 재질을 작업의 도구로 사용한다. 얇고 부실한 재료들이 모여 구축적인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먼저 표현적인 부분을 작가론을 쓰는 데 있어서 강조하는 이유는 부드러움을 표현하는 재질들이 드러내는 강건의 인체 조각들이 비정형의 재질이지만 정형적인 형태를 보여줌으로써 마치 한 소년의 성장기를 보는 것 같은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연결하는 것은 무수히 많은 바늘로 작가가 겪어온 많은 사건들이 녹녹치 않은 관계망 속에서 이루어져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기 때의 모습에서부터 얼굴, 두 소년 혹은 두 청년이 마주 앉아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을 법한 하얀 체육복을 입은 장면은 그것이 두 명의 자아이든 한 명의 자아가 마주보는 것이든 강건의  학창시절과 성장기의 많은 일들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작가는 새로운 공간, 학교 혹은 프랑스 유학시절 등 새롭게 부딪치는 곳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아기’로 표현한다. ‘아기’와 ‘또 다른 자아’를 통하여 작가의 내재적인 상황 속에서 낯섦과 성장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2018)라는 전시에서 등장하는 <쌍둥이>, <페르소나>, <보이-빌더>, <보이지 않는>, <악몽>의 연결고리는 그대로 한 청년의 성장기를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낯간지러운 일이기도 하겠지만, 누구나 겪었을 유년 시절의 불안감, 혼란스러움, 극대화된 이상향의 들고남이 부드러운 재질에 더하여 바늘까지 꽂히면서 관람객에게 어려운 상황은 가시적으로 전달된다. 한 사람에게 청소년기의 혼란스러움이 너무나 당연한 것 같지만, 강건은 평면 작업에서 보이는 초현실적인 색채감, 조각 작업에서 보이는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넘나드는 형식으로 특유의 섬세함을 드러낸다. 

유독 부드러운 재질로 주로 인체형상을 표현하면서 바늘이 동시에 박혀 있는 작업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아들을 둔 엄마로써, 특히 청소년기에 진입한 아들을 키워내기까지의 여정이 생각이 났다. 여성인 내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남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매우 독특한 경험이다. 엄마와 아이는 자주 경쟁적인 상황에 노출되고, ‘힘’의 세계가 가시적인 범위에서 보이는 상황에서 물리적 성장통과 심리적인 성장통을 동시에 겪는다.

덧붙여 강건 작가의 <소셜 클론>시리즈는 하나의 자아가 복제되어 다른 자아와 함께 하고 있는 내용을 담아 성장통의 상황을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보여준다. <Gesture>(2019)에서 작가는 자신을 표현하는 인형 조각에 가느다란 실로 연결된 다른 인형 조각에는 타인이 바라본 자아를 표현하고 있다.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른 두 자아는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던 세상을 타인이 바라보는 세상의 기준을 의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인 자아가 투영된 과정을 보여준다. 

자신이 갖고 있는 욕망은 다른 사회적 기준, 체계 등에 의해서 다시 재구축되고, 사람은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결국 본래 자신이 갖고 있는 욕망은 타자에 의한 시선으로 무의식적인 욕망에 의해 수동적인 주체가 되어간다. 어떤 상황에서는 타인의 욕망으로 이루어진 누군가의 욕망이 마치 나의 원래 욕망이었던 것처럼 혼돈스러운 상황이 되기도 한다. 강건의 작업에서는 자아를 동일하게 분배하여 ‘쌍둥이’ 혹은 ‘클론’으로 표현하여 동등하게 둘을 다루고 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본래의 자아와 타인의 시선으로 본 자아는 팽팽하게 함께 나아가야 할 길을 나누고 있다. 

하나의 몸이더라도 이렇게 삶을 향한 구축적인 상황은 <보이-빌더>(2018)에서 드러난다. 좀더 힘세고, 멋진 어른이 되고 싶은 소년은 근육을 키우고 운동을 하며 몸과 마음이 성장하도록 노력한다. 이렇게 울룩불룩하고 힘센 어른이 되고 싶은 소년은 몸이 커지는 보디빌더일 뿐 아니라 소년에서 어른으로 변화하여 가는 <보이-빌더>가 되는 것이다. 인간 관계,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상처받은 마음은 무수한 많은 바늘이 얼굴에 꽂히면서 관계 속에서 상처받은 모습은 그대로 작가의 신체에 드러나고, 바늘이 좀더 촘촘히 찍힌 장면은 <마스크>(2013)로, 또한 마스크는 <페르소나>(2017)로 거듭난다. 페르소나는 마스크와 마찬가지로 본래 ‘가면’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동시에 ‘외적 인격’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결국 집단적인 사회의 행동규범, 역할을 수행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내포하는 것은 철저히 타인의 시선, 공동의 규범으로 이루어진 체계 속에서 행동하는 인격체를 뜻하고 있다. 강건 작업에서 보이는 <페르소나>는 여러 얼굴이 붙어 있다. 즉, 내가 표현하고 싶은 자아와 타인이 보고 있는 자아가 뒤섞여 있는 포착된 장면이 강건의 <페르소나>인 것이다. 

강건은 이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사회적인 자아에 대하여 보다 주목하고 있다. <너와너>(2019)에서 사람의 두상은 여러 개가 연결되기 시작하였는데, 비슷한 입장의 자아가 여러 번 반복되면 결국 그것은 ‘집단’적인 자아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흔하디 흔한 청바지를 입고 세 개의 두상이 뒤엉킨 다른 작업 <제3자>(2019)에서는 오늘의 사회적 자아를 보다 직접적으로 강조한다. 작가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형성된 자아가 다른 이들의 거울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것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행동하지만 어느 순간 거울 안의 내가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도 모르게 ‘쨍그랑’ 그 거울을 깨는 순간 타인의 시선으로 비추던 자신의 모습은 산산조각이 나고, 자신의 본연의 모습이 세상에 드러난다. 이렇게 소년은 사회의 규칙을 몸으로 체감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둥글함’과 ‘모남’을 반복하며 어른이 되어간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드라마는 사르트르의 『닫힌 방』을 인용한다. 1945년의 희곡 『닫힌 방』 (Huis clos)에서 ‘지옥은 바로 타인이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결국 타인의 시선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그러한 설정을 고시원이라는 공간 속에서 풀어낸다. 전혀 틈이 없이 다른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일상의 공포’를 보여준다. 누가 공포를 형성하는 사람인지, 누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알 수 없는 관계는 타인이 주는 관심과 무관심의 반복 속에서 증폭되는 불안한 감정에 영향을 준다. 

강건에게 타인은 이렇게 지나친 관심이 주는 불편함, 혹은 무관심 속에서 소외되는 자신을 발견하며 자신을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위치시키기 위한 의식적인 대상인 동시에 ‘책임을 통한 성장’에도 무게를 둔다. ‘자유롭다’는 것은 ‘원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어떤 일들이 실제로 있었는지를 내면적으로 관찰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과정을 뜻한다.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러한 규칙에 맞추어야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해결이 될 것 같은데, 실제로는 내면을 관찰하는 일에서 시작하는 것이 다음의 행보를 결정하는 것이다. 

<소셜 클론>시리즈 중 양모를 종이에 붙여서 만든 평면 작업에서 작가는 자신의 모습을 프랑스의 시골 쥐들과 함께 보여준다. 침대 위에 누워서 잠을 청하는 순간에도 쥐는 작가의 주변을 맴돈다. 경상남도에 있는 레지던시를 오가며 작업한 같은 기법의 <우리 안 우리>(2019)는 초록의 개구리가 등장하면서 한층 편안해진 작가의 현재를 보인다. 가면을 쓰거나, 뾰족한 바늘로 관계를 연결하면서 ‘타인’에 대한 경계심을 보이던 과거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실천적으로 앞으로를 향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강건 작가에게 보이는 자신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질문들은 사회에 대한 무력감이 아닌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스스로의 답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관찰하고, 현재 주어진 사실을 인식하며 그것에 대한 의견을 작업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타인’을 말하지만, 그것은 결국 의식의 활동을 정돈하고, ‘내적 삶’을 해방하는 ‘자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이어간다고 할 수 있다. 

 

 

 

 

 

 

 

​고윤정 _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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