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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착상태: (Im) Perfection, 노(노) 시그널, 이상 (없음) 없음 

 

강건의 작업은 이상하리만치 통각을 자극한다. 작업을 볼 때 환기되는 발작적 경험과 신체적 반응은 주위를 얼어붙게 만드는 냉기와 축축함, 어디엔가 비밀스럽게 기거하는 것들의 쿰쿰하고 끈적한 향취, 낯선 형태와 질감의 병치가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연상 작용에 의한 것이다. 몹시 예민한 어떤 이는 강건의 작업을 응시하거나 전시장 사이를 거니는 사이 땀구멍이 조여들고, 콧구멍이 벌름거리고, 체온이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작업 앞에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긴장과 작업의 실물이 불러일으키는 생경함은 확실히 전에 없이 생경하고 불편한 감각이다. 그리고, 궁금증이 인다.

 

그래서일까. 나는 편안한 자세로 작품을 감상하기보다는 슬슬 주변을 돌며 작업을 들춰보고, 무엇인가를 훔쳐보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작가가 창조한 생명체와 그것들이 펼쳐진 씬(Scene) 안으로 진입하다 보면 어쩔 도리 없이 음침한 상상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가령,질긴 것에 결박된 말캉한 덩어리, 접붙여진 사물의 엉뚱한 윤곽, 증식되고 잘려 나간 것들의 기분 나쁜 단면을 차례로 더듬으면서, 미친 사랑(L’Amour Fou)에 속박된 누군가의 기이한 삶을 상상하는 식이다. 폭력과 사랑, 완벽과 비천함, 생동감과 죽음의 에너지가 무신경하게 오가는 작업 앞에서 가장 먼저 몸이 반응한다. 뒤따라오는 것은 초라한 상상력이지만, 이미 경직된 이성을 압도한다. 이윽고 마지막 순간, 작업의 시원점과 전개의 당위를 추론해 본다. 작업 앞에서 직관과 이성이 어지럽게 오간다.  

 

작가로서 강건이 집중해 온 일은 존재에 관한 형태적 상상과 시각화였을 것이다. 때때로 ‘존재’란 그 자체로 포괄적인 말이지만, 존재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차별적이고 배제적일 때가 있다. 그러나 작가에게 있어 존재란 생명체, 사물, 나, 타인, 추한 것, 아름답게 승화된 것, 죽은 것 혹은 여러 범주에 동시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는 복수의 것, 진공의 것, 잡종의 것일지 모른다. 존재의 위상과 정의를 조작, 변경하고, 자신의 인식을 수정하며, 새로운 지식과 감각을 표명하는 일을 작업을 통해 반추해본다. 

작가는 미완(未完) 혹은 비완(非完)이라는 표현을 명시함으로써 완벽한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에 대한 이중적 관심을 드러낸다. 완벽하지 않은 것을 강박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반대로 완벽한 것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열등의식, 그것을 해체하고 넘어서고자 하는 예술적 관심사이자, 이윽고 완벽하지 않은 상태를 애호하고 찬양하는 복합적 정서로 나아가는 기초단계일 수 있다. 사물과 타자에 투영된 자기애와 혐오, 타자적 위치에 놓인 것들에 대한 관심과 연대 의식, 예술가의 정체성에 대한 분열적 인식과 탈주, 개인이 마주한 사회현실과 시각예술을 둘러싼 교차적 시선은 작업의 형식과 내용에 자연스럽게 연계되어 나타난다. 인물상을 중심에 둔 대다수 작업의 경우, 형태적인 면에서 해체적이고, 다면적이며, 신경증적인 증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다중적인 안면, 파편화되어 해리되고 증식되는 신체 이미지의 표현은 작업 초기부터 발견되는 일관된 요소다. 좌우, 상하, 전체와 부분의 요소가 한쪽으로 종속되지 않고, 이중, 삼중, 다중의 모습으로 혼재된 인물의 도상들을 넓게 이해하자면, 작가의 자화상이자 자소상으로 독해될 여지가 있다. 동시에, 집단 속 개인의 존재에 관한 사회학적 시선을 투영한 것이기도 하다. 

 

가령, 2014년부터 약 5년에 걸친 프랑스에서의 미술 유학을 마치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개인전 <소셜 클론>(아트스페이스 오, 2019) 이후 여러 전시의 서사를 하나로 잇는 주제의식을 연결하여 살펴보자면 주로 ‘경계’와 ‘정체성’에 관한 것들이다. ‘외부인’, ‘클론’, ‘아메바’, ‘타아’와 같은 전시의 키워드가 증언하는 바는 안과 밖, 위와 아래, 타인과 자아와 같은 이분법적 세계에 관한 처절한 응시와 극복, 냉소 어린 구분과 기이한 통합에 있다. 초기작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페르소나와 마스크 작업은 석재나 나무 같은 전통적 재료가 아닌 실과 비즈와 같은 부드럽고 유연한 재료를 이용해 표층을 떠내는 동시에, 내부를 드러내는 독특한 조각적 방법론을 적용한 바 있다. 두상에서 흉상으로, 다시 전신으로 확장되고, 양모와 레진과 같은 다양한 재료가 개입되는 시계열적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흥미롭다. 샴쌍둥이와 두상이 더블/트리플 이미지로 증식되거나, 여럿인 것이 하나로 흡수되거나 분열하는 방식, 신체의 크기와 비례가 과감하게 쪼그라드는 것, 말단이 잘려 나가고 다시 접합되는 등의 이미지 플레이는 조각 문법을 스스로 확장해온 개인 작가의 체계적 이행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서사와 재현을 억압하고, 기하학적 추상으로 환원되는 현대 추상 조각과는 달리, 강건의 작업에는 죽음과 폭력, 파괴, 성애의 심리를 두루 자극하는 드라마로 가득 차 있다. 완만하기보다는 뾰족한 것, 건강하기보다는 병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작업은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 상처와 절규로 가득 차 보인다. 훼손되고 꺾인 남성 자아의 이미지는 여러 질감과 형태로 변주되어 곳곳에 출몰한다. 연약함은 손쉽게 폭로되고, 강인함은 끝내 은폐되어, 부드러워야 할 곳이 지나치게 경화되어 있고, 단단해야 할 자리는 짓물러 있는 것만 같다. 하나일 때 온전한 것은 둘 셋이 되어 서로를 휘몰아치고, 둘 셋으로 나뉘어야 할 것들은 한 곳에 착종되어 서로를 위협하며 공존하는 식이다. 어쩌면, 한정된 조건 안에서 작업의 스타일을 모색하고 하나의 양식으로 굳혀 나가는 초기의 시도들은 작가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자기투영적 작업이자, 작가가 추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조형적 선택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수의 전시를 거치면서 제작된 작업을 계열화하여 분류하고, 메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기로 진입하는 동안, 강건의 작업은 눈에 띄게 다변화되고 그에 맞는 다양한 서사가 붙기 시작했다.

 

2021년에 열린 전시 <타아상실>에서는 시각적으로나, 촉각적으로 높은 강도의 하이브리드 조각이 대거 등장한다. 바늘과 실을 이용한 부분적 표현과 인조모피와 같은 텍스타일의 활용은 과거의 작업으로부터 연결되는 유사성이지만, 그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체적으로 커진 볼륨과 조각 개체의 확장, 다양한 자세와 괴물성이 극대화된 실루엣으로 인해 전시 전체가 하나의 ‘씬’으로 형성된 듯한 뉘앙스의 변화점이다. ‘비완성’, ’낡은 새것’, ‘다른다른 사람’과 같은 모순형용의 의미화가 그 어느 때보다 조각의 표현 형식과 극렬하게 공명하며, 작업이 지닌 독자적 인상을 가속화한다. 이 시기에 캔버스에 양모를 부착하여 표현한 작업 시리즈 또한 흥미롭게 전개된다. 벽에 부착되는 평면 매체로 제작되었음에도 다양한 비례와 질감, 배치감각이 적용된 독립적 매체이자 공간 안에서의 3차원적 부피감을 결합하고 있다. 밀도를 갖춘 비교적 큰 규모의 전시 경험 이후, 작품의 제작과 새로운 재료의 적용과 실험 속도에는 탄력이 붙은 듯하다.

 

최근에 진행된 전시 <비완 Imperfect Normal)>(N/A. 2022)에서는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 삶에 관한 관찰의 온도에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 작업의 덩어리들이 가본 적 없는 지역의 고대 토템처럼 이리로, 저리로 흩어져 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제의적이지만, 동시에 무신경하게 흩어진 프랍(Prop)같기도 하다. 무엇을 위한 의례에 동원되는 지, 어떤 내용의 공연을 위해 서있었는지 달리 짐작할 길 없다. 강건이 만들었던, 그리고 여전히 열성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체계적으로 이상한’ 문자 그림, 인체를 떠올리게 하는 페인팅, 모든 면이 빈틈없이 ‘패치워크’된 것 같은 다면적 안면과 입체들은 부분과 전체, 나와 타자,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죽음, 완성된 것과 미완 상태를 동시에 표현하는 극단적 혼성성을 펼쳐낸다. 각각의 요소가 모여 하나의 씬을 이루고, 이질적인 존재들이 병치되어 하나의 시야에 들어올 때 종합적 상황이 된다. 양모와 합성 모피, 깃털과 같은 보드라운 재질과 그것들 사이로 비죽하게 솟아오른 바늘의 날카로움, 레진의 딱딱함이 결합된 재료의 이질적 믹스매치와 파편화된 신체 덩어리로 인해 감각의 통합을 마디마디 파괴한다. 작업이 촉발시키는 심리적 효과와 감정의 진폭을 매체의 문제로 다루는 일, 보편적인 미술의 언어로 해설하는 일 모두 충분치 않아 보인다. 

 

그런 점에서, 작업은 여전히 교착 상태에 있다. 정확히 말해, 미결 상태에 빠진 것은 작업의 감상과 감정적 공유에 관한 지점이다. 작업을 둘러싼 비평적 분석과 작가의 변, 관람객으로부터의 피드백이 충분히 축적되거나 섞이지 못한 채, 지난 시간 강건이 선보여온 일련의 작업은 독특한 아우라와 뉘앙스는 감각의 층위에서, 불투명한 말들로 소환되어 왔다. 기묘한 아름다움 앞에서 관객들은 긴장하고, 모호한 어두움에 당황한다. 전시의 장면이 그렇고, 작업이 재현하는 대상이 그렇다. 존재의 위용과 잡스러움, 성적인 흥분과 소강상태, 병적인 집착과 순수한 열정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들의 풍경은 조금 전까지 몹시 뜨거웠다 급랭해버린 것처럼 경화된 말랑함이 있다. 드세지만, 연약해 보인다. 또한 잡스럽지만 신비하다. 인상 비평만으로는 작업을 이해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지만, 선명함이 결여된 상태로 서술되고 있는 지금의 글을 출발점으로 하여, 바깥에서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가 본다. 

 

한편으로 나는 작가의 세계와 관객의 이해, 드러난 몸체와 장기 안에 은폐된 의도, 표면의 증상과 진피에서 쏘아 올리고 있는 묵직한 시그널 사이의 ‘교착’ 상태가, 서로가 서로에게 쉽게 교신할 수 없는 최소한의 ‘간극’이 너무 빨리, 너무 완벽한 수준으로 해소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지독한 세속의 세계와 예술적 아르카디아, 정신적 지향점 간의 교차면이 실로 엄청나게 비좁고 가파른 언덕인 것처럼, 모든 것이 명료하게 이해되고, 공평하게 이해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가끔씩만 작동되는 미약한 시그널 속에서, 이상 없다는 그 말, 오해 없다는 신호, 아무도 다친 사람 없이 건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확언을 불신하며, 의심만을 확고하게 믿어본다. 예술의 이름으로 매혹적으로 어두움을 그려내고, 작가가 규정한 창작의 과업 안에서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파격적으로 교배하고 잉태시킴으로써 미술 애호가들의 중산층적 미감과 안온한 관람을 파괴하려 드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잘라내고, 작가가 보내온 존재의 시그널을 따라, 땀구멍과 콧구멍의 감각에 의지하여 비좁고 가파른 언덕을 바라본다. 송신 방향을 향해 귀를 기울이며 메아리로 돌아오는 소리를 듣는다.

 

노 (노) 시그널, 이상 (없음) 없음.

 

 

 

 

 

 

 

​조주리 _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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