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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아상실 개인전 전시전경,
수원시립미술관- 아트스페이스 광교, 2021


Perte de l'autre moi, Vue d'exposition personnelle
Suwon museum of art-Art Space Gwanggyo,
Corée du Sud,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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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가는 길>  고윤정/독립기획자  

  강건은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작업을 시작한 이후 <이방인>(2016), <소셜 클론>(2019), <반.사.인>(2019), <다른다른사람>(2020), <아메바>(2020) 등의 개인전을 가져왔다. 전시의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작가가 꾸준히 말하고 있는 것은 ‘나’와 ‘타자’,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관계이다. 작가는 프랑스에 처음 정착했을 때, 프랑스어 억양이 어눌하여 뒤죽박죽 얽힌 정체성으로 7년을 보냈다고 한다. 마치 아이가 태어나서 가족과 소통하면서 관계를 배워가듯 작가는 타지에서 새롭게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게 된다. 소년에서 어른으로 <보이-빌더>(2018)를 통해 성장하듯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은 개인으로서는 고통스러운 성장통이었을 것이다. 2019년에는 주로 여러 사람을 복제하거나 ‘나’와 ‘너’의 관계를 실로 잇고 촘촘한 사회적 관계망을 표현하였다면, 2019년 말에서부터 지금에 이르는 작업들은 자아와 타자를 또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과거의 작업에서 조금씩 보였던 실마리들이 지금 확장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2020년부터 등장한 <순수잡종>, <새인간> 등은 신체를 여러 번 꼬아 놓았거나, 사람과 새를 결합하는 등 적극적으로 자아의 모습을 변형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작업들을 보면서 내가 불현듯 떠올랐던 것은 어렸을 때 읽었던 『나니아 연대기』이다. 그때에는 영화가 나오기 전이라 오로지 사람과 동물이 하나가 된 장면은 텍스트에 의존해서만 상상했어야 했는데, 아주 신비롭고, 영험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반인반수의 모습이 강건의 작업과 묘하게 겹쳐져 있다. 현대에 와서는 반인반수의 모습은 다양한 캐릭터와 결합하여 돌연변이나 괴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하게 보이기도 하다. 고전 서양미술에서 등장하는 반인반수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남성스럽고 강하며 사냥을 잘하는 특성을 갖고 있기도 하고, ‘사이렌’처럼 여성적인 형태도 있다. 강건 작가의 <새인간>, <비완성인>, <덩어리> 등은 사람의 얼굴에 새의 형태를 접목시킨다. 혹은 사람의 외형이 다른 색을 띄고 있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돌연변이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특히 <비완성인>, <덩어리>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이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새인간>에서는 손목, 발목이 마치 묶여 있는 것처럼, <덩어리>는 벽으로 도망치지만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비완성인>은 머리가 없어 주저 않은 모습으로, 강건의 반인반수는 어딘가에 묶여 있고 뒷통수를 맞은 듯 속절없이 어떤 상황을 당하고만 있는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통적으로 반인반수는 주로 신비감을 주거나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일들을 대신하는 또 다른 존재로 표현된다면 강건의 작업은 뒤틀린 모습이나 몸의 형태에 맞게 동물의 형상을 결합하여 절박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표출한다. 그것은 마치 부메랑처럼 작가가 현실과 이상을 오고 가면서 계속해서 현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뜻한다. 예술가로서의 성공과 많은 이상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노력을 하지만 그것은 상당히 쉽지 않은 과정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게 여러 가지 굴곡이 있으면서도 목표와 현실은 지속된다. 이 과정은 동료 예술가, 예술계에서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고, 가족 간의 관계를 뜻할 수도 있다. 한편 강건은 프랑스 자수실과 천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처참한 외형의 모습은 분홍색이나 회색의 부드러움을 통과하면서 처참하기보다는 ‘받아들여질 만한’ 모습으로 바뀐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에서 세상을 향하여 교류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지만 손과 발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머리가 없어 완벽하게 사고할 수 없음을 절감하면서 여전히 그는 철저히 ‘아웃사이더라’는 것을 재차 확인한다.

  <타아상실>이라는 제목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자아가 형성이 된 듯, 혹은 타아가 상실된 듯, ‘너’와 ‘나’는 구별되기 어려울 만큼 작가에게는 예술계와 현실이 괴로운 상황이다. 타자의 시선으로 나를 보아도, 나의 시선으로 다른 이를 보아도 크게 나아질 것이 없다. 더군나 잘 극복한 듯 보이면서도 불현듯 나타나는 일들은 아주 갑작스럽기 마련이다. 작가는 <새인간>과 <덩어리>와 같은 작품들을 살면서 맞닥뜨리는 갑작스러움처럼 전시실의 공간을 급습하는 형국으로 펼친다.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외형적인 뒤틀림보다 자아를 잃어버렸다가 되찾아가는 주인공들의 마음 속으로 비추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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